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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20.10.20
admin

 

1.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내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실존철학의 창시자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Descartes)는 감각이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고 그의 방법적 회의에서 주장하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매년 11일이면 사람들은 새로운 해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해 해돋이 명소를 찾는다. 한겨울의 추위에 몸을 떨며 해가 떠오르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다가 이윽고 태양이 먼 바다 위로 얼굴을 내밀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기쁨에 들뜬 함성을 터뜨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며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대자연이 선물하는 장엄한 일출을 바라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다지기도 하고 새로운 한 해를 불태울 열정을 가슴 가득히 품기도 한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시는 매년 2월 말부터 3월 초 사이의 기간 중 4일간의 기일을 정해 토요일 밤부터 수요일 새벽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가 바로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리우카니발 축제이며, 축제의 가장 큰 볼거리는 삼바퍼레이드이다.

 

화려함의 극치요, 열광의 도가니인 이 축제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았다고 한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으로 화려하게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골반을 전후좌우로 격렬하게 흔드는 400여 명의 삼바 무용수들, 화려하게 장식한 축제차량,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의 행렬과 700미터의 도로인 삼바드르모를 가득히 채운 채 열광하며 즐기는 군중들을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광란의 물결에 자신을 던진다.

 

브라질의 카니발은 단순히 화려한 축제가 아니며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브라질의 정체성이 담긴 행사로서 정치에 대한 불만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행사이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 웃고, 즐기고, 떠들며 진행되는 축제는 쾌락의 극치를 갈망하게 되고 일상의 자아를 망각하는 상태로 군중에 의해 공황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일탈현상에 의해 음주와 폭력사고가 발생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눈을 뜨고 그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신이 허락한 큰 축복 중 귀중한 것이다. 경이로운 대자연을 보고 감탄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를 보며 행복을 느끼고, 하얀 지팡이에 의지하여 길거리를 지나는 시각 장애인들과 마주칠 때면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본다는 행위는 무엇을 보고 어떤 인식을 하느냐에 따라 해돋이의 장엄함과 경건함, 리우카니발의 광란에 물든 화려함과 무절제로 인한 각종 사고들을 낳기 마련이다.

 

이처럼 우리는 본다는 행위로 인해 극과 극에 해당하는 결과를 얻게 됨으로써 보아야 할 것과 보아서는 아니 될 것,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할 것과, 경계를 하여야 할 것을 가려볼 줄 아는 혜안이 함께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났다.

자유의지는 어떠한 행위를 함에 있어서 선택을 요구하게 되고 선택의 결과로 인간의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진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를 두셨다. 그리고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명하셨다.

 

지상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의 꿈같은 삶은, 간교한 뱀의 꾐으로 인해 여자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행위를 함으로써 종말을 하게 된다. 여자가 그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인간에게는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스스로 행사 할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결과도 알려주셨다. 그러나 여자는 그 열매를 본 순간 시각적 자극으로 인해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단계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의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에 의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내적자극은 배고픔의 자극에 의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일으키고 육신의 안정을 유지하기 자극에 의해 잠을 자게 되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 등을 이룰 수 있다. 외적자극은 선악과를 봄으로써 얻어지는 시각적 자극에 의해 선악과를 따서 삼키는 행위를 일으키고, 맛있는 냄새를 맡음으로써 얻어지는 후각 자극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일으키는 행위, 화려한 드레스를 보고 사서 입는 행위,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사서 손가락에 끼는 행위 등으로 오감의 자극을 통해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을 이름이다.

 

여자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은 행위의 동기는, 뱀의 꾐이 일차적 동기이나, 주된 동기는 그 열매를 쳐다봄으로써 얻어진 시각 자극에 의한 인식이다. 여자가 감지한 세 가지 인식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인식은 여자의 식욕을 자극하게 되고, 자극은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행동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먹는 행위를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망을 당하게 되었고, 지상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였으며, 오늘날 인간이 지고 있는 생의 모든 질고를 당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자에게 먹는 행위를 야기 시킨 시각자극이 없었다면 원인이 사졌으니 결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본다는 것이 가능함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볼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님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외양간 청소가 귀찮으니 소를 키우지 말자는 것과 같다. 소를 키워서 얻는 소득이 외양간 청소에 필요한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중에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극히 일부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강렬한 자극을 지닌 삶의 부속물들이다.

 

부속물들은 화려하고 강렬한 시각 자극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처럼 인간의 행위를 일으키는 선택에서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본다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축복이다. 이 큰 축복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선 눈에 띄는 수많은 것 중에서 가려볼 줄 알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선 수많은 것들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취사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화려하고 강렬한 시각 자극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눈을 뜬 자들은 화려하고 강렬한 시각 자극에 의해 본질을 깨달음에 오류를 범하기 쉬우나, 눈을 감은 자들은 시각적 자극이 없으므로 이러한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져 본질을 깨달음에 더욱 더 명확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 견물생심이란 게 있듯이 인간은 눈에 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스올과 멸망의 구덩이가 만족을 모르듯 사람의 눈도 만족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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