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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는다는 것 |
20.10.27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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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빛 한 점 느낄 수 없는 암흑 속에서는 우리는 모든 색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면서 노란 유채꽃을 또렷하게 그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은 현란한 현상의 유희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상의 카오스 속에서 하나의 선택을 한다는 것은 제자리 돌기를 100회 하고 목표지점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러할 때 사람들은 현란한 현상의 카오스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며, 선택의 결과에 의해 행복과 불행 중 하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올바른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선 선택할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대상의 본질이 아닌 현상에 현혹되어 선택을 하게 된다면 결과는 필히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강렬한 영향을 가지는 것은 시각자극이다. 즉 시각자극이 나머지 청각, 촉각, 후각, 미각보다 가장 우선시되어 시각적인 게 모든 감성을 지배하게 된다. 21세기의 시대는 도상적 전회(Iconic turn) 혹은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 의 시기라고 한다. 문자로 구성된 모든 것들이 영상으로 대체되고 이미지화 된 디자인의 시대가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보여지는 현상은 본질이 자극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행위로 표출된 것이기에, 하나의 현상을 통해 객관화된 본질의 일부분을 보고 귀납적 추리에 의해 본질을 유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상에 의한 본질의 유추로 선택의 대상을 판단하기에 이러한 오류로 인한 잘못된 선택은 자신이 원치 않았던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현란함으로 가득 찬 현상의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할 수 있으며, 화려한 색상으로 뒤덮인 칼라풀한 세계에서 단순한 무채색의 세계로 전이를 하는 것이다. 복잡함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단순함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선택의 정확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모든 자극 중에서 가장 강렬한 작용을 하는 시각자극을 탈피해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자신의 욕구를 더욱더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세계의 스캔들로 인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파멸로 마친 유능한 인재들이 많다. 그 스캔들 중 거의 대부분은 여성과 관련된 것이며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이 스캔들의 주된 요소이다. 보잘것없는 가문의 가난한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양치기에 불과했던 다윗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험난하고 모진 고충에서 살아남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써 엄청난 축복으로 대제국을 다스리던 다윗이, 그의 생애에 저지른 몇 안 되는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의 목욕장면을 보고 그를 왕궁으로 불러 함께 동침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다윗은 잊은 것일까? 아니 시각자극은 하나님의 계명마저도 어기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길을 걷다가 가로등에 부딪혀 뒤로 넘어지거나, 장애물에 걸려 앞으로 엎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눈을 뜬 정상인들이다. 이에 반해 시각 장애인들은 그들의 손에 들린 흰 지팡이로 인해 넘어지거나 엎어지는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눈을 뜬 정상인들이 이러한 수난을 당하는 것은 주변의 그 무엇에 눈길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사람들은 주위의 강렬한 자극에 눈길을 빼앗겨 현상의 카오스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이처럼 두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인간을 수많은 유혹으로 인도하여 파멸로 이끄는 행위의 단초이다. 로마제국의 위대한 영웅인 줄리어스 시저를 무릎 꿇게 한 ‘클레오파트라’와 폴 고갱의 작품 ‘아레아레아’에 나오는 타히티의 여인 중 한 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9명의 남자는 클레오파트라에게로 달려갈 것이요, 나머지 한 명의 남자만이 ‘아레아레아’의 여인을 고를 것이다. 9명의 남자와 1명의 남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9명은 두 눈을 뜬 정상인이요, 1명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란 외관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눈을 뜬 정상인들을 육안으로 들어온 현상의 화려함 때문에 클레오파트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은 심안으로 본 ‘아레아레아’의 본질 - ‘아레아레아’는 기쁨이란 뜻임 - 을 보았기에 그를 택한 것이다. 이 선택의 결과로 종국에 클레오파트라를 선택한 9명은 파멸에 이르는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요, ‘아레아레아’를 선택한 1명은 행복에 이르는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두 눈으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신이 허락한 커다란 축복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의 폐단은 앞서 느낀 바와 같이 우리는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기 위해선 감는 법도 배워야 한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의 선택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정상인의 육안으로 현상의 유희에 휘둘려 그릇된 선택을 택하기 보다는, 시각장애인처럼 심안으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신이 허락한 삶의 본질이다. 생존의 조건에 있어서 두 눈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 꼭 있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시각 장애인은 삶에 있어서 두 눈을 가진 정상인보다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 한편 바라는 것이 적다는 것은 쉽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쉽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탐욕은 끝이 없고 행복은 언제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감는다는 것은 감는 횟수가 많을수록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고 바라는 것이 적어지며 행복에 더 빨리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자거나, 명상을 위해 눈을 감는 것 외에는 자의와 타의에 의해 항상 눈을 뜨고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또한 내가 보게 된다는 것은 타자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 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마술의 세계나, 시간성과 공간성의 지배하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우리를 카오스의 세계로 이끌어 들인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게 되면 항상 변함없이 어제의 그 자리에 오늘도 그대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를 않다. 바다는 12시간 25분을 주기로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씩 일어난다. 조수 간만의 차이는 우리나라 동해안보다 서해안에서 최대 크기가 10m에 달한다. 즉 바다의 높이가 낮은 때보다는 10m가 높아졌다가 높은 때 보다는 10m가 더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저 광대한 바다가 10m 높이를 가진 바닷물의 양이 이리저리로 쏠려 다니며 변화한다는 사실은 지구로부터 386,242km(지구 지름의 10배)나 떨어져 있는 달의 인력에 의해 일어나는 놀라운 것이다. 이로 미루어 바다는 매 순간을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과 행복에 대해 ‘사람들이 그처럼 매혹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처럼 골몰하고 있는 것, 그러한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갈망하는 것 속에 자신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바라며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한다.’라고 말하였다. 마음의 평화는 헛된 욕망의 충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같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러한 헛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네가 오늘까지 쏟아온 노력의 반이라도 좋으니,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힘써 보라, 그러면 너는 곧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외부의 자극으로 그의 눈을 뜨게 만들면, 사색하던 사람은 암흑 속에서 머물며 얻은 평정심이 눈을 뜨게 됨으로 갑작스레 나타난 표상에 의해 깨트려지게 된다. 이는 곧바로 평정심을 잃게 되고 그가 추구하던 사색의 본질에도 이르지 못하게 된다. 눈을 감음으로써 새롭게 보이는 세계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펼치는 현란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정상인이 육안으로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과 추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또한 감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기에 단지 좋고 싫음만을 구별하여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게 되어 보다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눈을 감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만 추구하게 되고, 인간의 외적인 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상인에 비해 자신의 내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어 보다 쉽게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을 수 있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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