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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식-주 |
20.11.05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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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주인은 나의 영혼이다. 육신은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혹자는 육신이 주인이 되어 영혼이 육신을 섬기는 거꾸로 된 삶을 살고 있다. 불멸의 영혼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면 그는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불리는 고귀한 영혼인 본질을 담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육신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다. 담는 도구로서의 그릇은 흙으로 빚어 굽거나, 금속을 녹여 만들거나, 유리, 나무, 플라스틱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 수 있는 것으로써 그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기구로서의 역할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기능을 요하는 그릇은 그것이 값싼 질그릇이든, 고급 백자이든, 화려한 크리스털이든 그것이 지닌 현상학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 그것을 구성하는 물성 가치는 그릇이 지니는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세계최고급의 와인을 나무국자로 떠 마시든, 화려한 쟁반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잔으로 마시든 두 손을 모아 떠 마시든 우리 몸은 와인을 마셨을 때 그 맛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신은 정신을 담기 위한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상으로 드러난 용기(포장지)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그 무엇(정신)’이다. 책상 위에 최상급 다이아몬드를 싸고 있는 구겨진 신문지 뭉치와, 조그마한 돌 조각이 들어 있는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금으로 만든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을 때 사람들은 신문지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물건으로 규정하고 금갑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진귀한 보석일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러나 포장을 벗기고 내용물을 확인하였을 때 신문지에 사인 것이 휴지통에 버려질 것이 아닌 진귀한 다이아몬드이고 금갑 속의 진귀한 보석으로 여긴 것이 한낱 조그마한 돌 조각임을 알아차린 후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은 것에 대해 스스로 화를 낸다. 그리곤 포장을 한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하게 된다. 왜 포장을 할 때 자신들이 예단한 그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은 생사를 해탈한 고승이 누더기 옷을 입고 세인들과 한데 섞여 노상에서 식사를 할 때에,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고급 승용차가 멈추고 그 안에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 스님이 황급히 뛰어내려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큰 절을 올렸다면 주위의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될까? 스타 스님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던 저 고승은 왜 TV 에 출연도 않고 큰 사찰에서 설법도 않으셔서 우리가 몰라보고 푸대접을 하게 하였다고 분을 내며 따지고 들 것인가? 아니면 초라한 행색을 한 고승이 ‘나는 생불이오.’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것을 탓을 할 것인가, 고승이면 흔히 보아 오던 스타 스님들처럼 신분에 어울리게 고급 차와, 비싼 천으로 지은 승복을 입고서 근엄하게 나타나지 않았기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따질 것인가? 그 어떠한 이유도 고승에게 분을 내고 탓을 할 것이 될 수 없다. 고승은 현 상태의 표상으로도 만족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라면 이유일 수도 있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고승은 왜 일반인들이 평소에 보아 왔고, 예상해 왔던 표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기들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표상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현실에 표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분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사람들에게 보인 고승의 자연스러운 표상으로서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기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지금까지 보아 왔던 스타 스님들의 그 훌륭하고 존귀한 표상으로 여겨진 모습을 스님의 본질로 보고, 본질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이아몬드는 못 보고, 구겨진 신문지만을 보고서 내용물을 예단한 어리석은 행위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보는 존재인 동시에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주는 영혼을 담는 용기의 구성요소이다. 인간의 육신은 의식주를 통해 꾸려진다. 이들 3요소의 본질을 하나씩 규명해 보자. 의(衣)의 본질은 인간의 육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육신을 보호하여야 하며,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보온의 기능이 제대로 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지는 자로서 타인의 눈에 비쳐지는 현상으로서의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자는 두터운 무명옷을, 혹자는 누비옷을, 혹자는 밍크코트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이불을 두르고 다닌다는 것은 비쳐지는 현상으로서의 문제에 혐오감을 일으키게 되므로 이러한 행위는 피해야 한다. 식(食)의 본질은 인체의 모든 부분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섭취하는 것이다. 영양분의 섭취는 문화와 생활습관 등에 의해 다양한 형태가 있으나 사회적으로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생식을 하든, 불로 익히든 그 섭식 방법론과, 채식을 하거나, 육식을 하거나 섭식의 종류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제약도 없다. 불교도들은 육식을 금기시하므로 채식만을 하도록 되어 있으나, 육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섭식을 제제할 수 없으며, 무슬림들이 돼지고기와 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섭식을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과 선호도에 따라 사회에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지 섭식할 수 있다. 주(住)의 본질은 외부로부터 자신의 육신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있다. 추위와 더위, 외부의 적의 공격으로부터의 보호, 자연의 재해로부터 보호 등의 공간을 일컫는 것으로써 육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 그 형태가 토굴이든 동굴이든 가옥이든 관계가 없으며, 사회인으로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주의 중요한 요소는 공간성(지역 환경)에 의한 것으로써, 주거의 편리성과, 개인의 정체성, 건강한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환경적 제약을 받는다. 의식주의 3 요소에는 공통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법칙이 있다. ‘과유불급’( To go beyond is as wrong as to fall shot)이 의식주에 적용한 철칙으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것은 실제로 아주 적다. 그럼에도 인간의 탐욕은 끊임없이 행해진다. 이러한 것은 타인의 취미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거나, 보여진다는 것에 의해 파생되는 욕망들이다. 허영심, 공명심, 과시욕 등의 인간의 명성에 대한 모든 욕망들로서 이러한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을 모르며, 끊임없는 탐욕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식탐은 가장 일반적인 죄악이다. 우리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최악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무서운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우리를 야수보다 포악하게 하고, 양심이나 우정 인간적인 교류,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빼앗아 사람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그러한 비참한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 노예상태를 즐기게 되어 그 같은 상태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병은 웬만해서는 낫지 않고 그들 속의 야수도 얌전해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물질에의 탐욕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적은 것에 길들면 길들수록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네팔, 부탄, 티베트는 황폐한 땅과 극한 환경적 여건으로, 먹을 것도 형편없고, 볼품도 없는 미개발 국가이다. 그럼에도 행복지수를 평가하면 전 세계에서 최상위로 드는 국가들이다. 문명이 발달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어떻게 저러한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나라임에도, 그들의 해맑은 얼굴과 아름다운 미소를 보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들 국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이 신의 뜻이고 축복이라 여기며 항상 감사하고, 긍정적인 활기찬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하루에 두 끼의 식사만으로도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 두세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 사회 복지라고는 전혀 누릴 수 없는 이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우리들(문명국가)이 갈망하는 행복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일까? 원하는 것이 적고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가깝고, 원하는 것이 많고 조그마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가깝다. 소크라테스는 ‘향락과 사치가 바로 너희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행복이다. 따라서 아주 조금밖에 바라지 않는 것은 그 최상의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척박한 땅과 열악한 환경에 묻혀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고도의 문명이 발달하고, 기름진 토지와 좋은 환경에 묻혀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보다 높은 것은 용기를 치장하는 데 가치를 두지 않고 영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들만의 삶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고가의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온몸을 두른 일련의 집단이 사치스런 웃음을 날리며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접시에 고급 음식을 담아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특권이 자신들에게만 허용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큰 행복감을 느끼며 인생을 찬양한다. 그 시각 맞은편 건물에 불이 켜지고 몇몇 사람이 한눈에 보아도 능히 그 가격을 짐작할 수 있는 드레스와 슈트를 입고 잔잔한 실내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간혹 흘러나오는 교양이 흐르는 웃음소리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황금접시와 황금포크, 황금나이프에는 화려한 빛을 뽐내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보게 되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들이야말로 금수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인물이라며 커다란 행복감에 젖어 있던 이들은 지금은 맞은편 건물에는 들어갈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상대적 박탈감과 초라한 심정에 불행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현실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잠자리에 제대로 들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 다른 한 곳에서는 초라한 지붕 아래에서, 변변치 않은 음식을 차린 밥상에 둘러 앉아, 배불리 먹지도 못하면서도, 행복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후 이내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욕망은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상황 즉 현재 누릴 수 없는 상황의 즐거움과 결부시키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설사 자신이 얻기를 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하더라도 이것에 의해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인간 그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는 상황에 이르면 또 다른, 보다 상위의 욕망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 가운데 가장 통제가 어려운 게 식욕이다. 동물이라면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무리에게도 공격을 하는 행위는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한 당연한 원초적 본능이다. 인류사 최초의 전쟁도 식량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 이성을 지닌 가장 뛰어난 존재이기에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능을 추구하는 동물 중에서 인간은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다. 한 실험에서 식사를 마친 동물들의 위를 절개해, 위의 용량과 섭취한 음식의 용량을 조사해 본 결과, 인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들은 위의 용량의 70~80%에 해당하는 음식만을 섭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인간만이 위의 용량을 초과한 음식을 섭취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를 두고 ‘사디’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먹을 일이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 먹지는 말도록 하라’고 경고하였다. 위(胃)는 먹으면 먹는 만큼 그 크기가 자꾸 늘어난다. 이처럼 인간의 탐욕의 주머니는 아무리 채워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만족을 할 줄 모르는 특성을 지녔다. 또한 인간은 이성을 지녔기에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탐욕이 추가되었고 이러한 탐욕은 자신의 존재감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에 목적을 둔 용기를 치장하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릇은 ‘그 무엇’을 담는 데 쓰임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 즉 ‘다이아몬드’이지, 다이아몬드를 싼 구겨진 신문지가 아니다. 여기서 다이아몬드를 지칭한 것은 실제로는 물질이 아닌 비물질인 영혼이다. 물질로 존재하는 그릇(육신)은 금이 가거나, 깨트려져서 그 사용에 부적당하지만 않으면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영혼은 그 어떤 물질로 구성된 그릇이든지 아무런 관계없이 항상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영혼과 세속적인 행복을 동시에 돌볼 수는 없다. 세속적인 행복을 바라거든 영혼을 거부하라. 만약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싶거든 세속적인 행복을 부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분열만 되풀이 하다 결국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 에픽테토스 6.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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