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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1장1절
21.01.03
admin

 

 

1.天命節旨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성()이라 하고,

()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하며.

()를 닦는 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성()이라 하고,

 

하늘이 명한다(天命)라는 것은 인간이 어겨서는 안 되고, 필히 지켜야 할 준엄한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일컫는 하늘()하나님’, 혹은 절대자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인간이 생득적(生得的)으로 타고 난 선천적인 성품()을 일컫는다.

 

하늘은 왜 성()을 명()한 것일까?

()나 행()이 아닌 명()이라 한 것은 상위의 절대자()가 하위의 존재자()에게 내리는 절대복종을 의미하는 준엄한 요구이다. 이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수동적인 자세로 복종만을 강요한 것이다. 즉 성()을 대체할 것이 전혀 없기에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인 자유의지를 강제하여 참된 인생의 길은 외길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을 천명(天命)이라 하였으니 성()의 본질을 밝히 알아야 한다.

()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요, 온전함이며 사랑이자, 양심을 일컫는 것이다.

또한 불경에서 말하는 공()이요, 불성이며 자비이자, 참마음(淸淨心)이다. 성경에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라며 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어머니의 태속에서 생명체로 존재하는 그 순간-‘정자난자가 만나 수정을 거쳐 수정란으로 자궁 내벽에 착상하는 순간-부터 타고 난 것으로서 고유의 온전함을 지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태내에서의 퇴출(출산)을 통해 성()에 반하는 이성(異性)을 생득적으로 가지게 되니, 참 성()인 진아(眞我)와 이성(異性)인 가아(假我)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삶의 모든 번뇌와 고통은 진아와 가아의 충돌 속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이를 두고 성경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중략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씀으로 인생의 질고를 표현하고 있다.

 

진아(眞我)중생들이 있다고 집착하는 변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자아이며, ”열반의 경지에 이른 진실한 자아라고 불교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원불교대사전에서는 참 본성의 의미“, ”본래 성품을 회복한 자기 자신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가아(假我)란 진아(眞我)에 반하는 개념으로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하며. 나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서의 참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거짓 존재라는 뜻이다. 즉 본질적으로있지않지만 현상적으로만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며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법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법은 곧 마음의 법이며 천명의 성을 이르는 것이고, ‘지체 속의 한 다른 법죄의 법으로 이성(異性)을 일컫는다.

 

태아의 출산 시기가 다가오면 산모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태아를 배출시켜야 하고, 태아는 40주를 걸쳐 누려오던 안락하고 편안한 태속에 머물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태아와 산모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산고(産苦)이다. 이 산고로 인해 사산을 하거나, 출산으로 인해 산모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일어 날 정도로 태아와 산모 간의 싸움은 치열한 것이다. 산모로부터의 퇴출 과정 속에서 태아가 실존의 인간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 출산 후 자가호흡이 이루어진 순간- 아이는 자기보호본능에 기인한 공격성과 결핍, 그리고 분리불안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자기 보호 본능은 근본적으로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서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무의식은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식욕과 성욕, 기타 안락을 추구하는 요소 등으로 프로이트는 이것을 리비도라고 부름-와 공격성, 방어기제, 트라우마, 스트레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무의식의 욕구는 이성(理性)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전의식을 통해 즉각적으로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이 의식을 지배하고, 초자아가 자아를 지배할 때에는 무의식은 몸을 도사린 채 드러나지 않으며 이 상태에서는 진아가 지배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은 가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모든 탐심이 가아의 본질이며 이는 강렬하고, 자극적이며, 화려함을 본성으로 내세워 인간의 취약점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종국엔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진아와 가아에 의해 서로 대립되고, 모순적인 본질을 지닌 복합체로서 한 생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모든 행위 중 진아에서 발현된 행위, 즉 천명지위성(天命之性)의 성에 따른 것은 진아에서 발현된 당위성(當爲性)에 기인한 행위이어야 한다. 당위성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무위(無爲)의 성질이며, 목적성이 없는 자연의 성질을 띠고 있다. 이를 노자(老子)’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위성이 아닌 모든 것은 작위성(作爲性)의 성질에 속한 것으로 이는 가아에서 발현되는 탐심(貪心)으로서 목적성과 방향성 그리고 자연력(自然力)이 아닌 욕구에 의한 인위력(人爲力)을 요하고 있다.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하며.

 

인간의 일반적인 삶은 인간의 본질의 두 요소 중 하나인 이성(異性)의 지배하에 이루어지며 이는 동물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삶의 원초적 욕구이다. 이성(異性)은 성()과는 배치되는 것으로서 공격적이며, 강렬하며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다. 이러한 이성(異性)의 본질을 벗어나서 성()을 따른다는 것은 도를 이루는 힘든 일이다.

 

()란 삶의 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진리(Dharma) 자체를 로 보기도 하며, 성경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라는 말씀으로 도를 두 종류로 분류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도는 좁은 길이자 생명의 길을 의미한다.

 

세간에는 사람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야말로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참된 도()는 인내와 절제를 요구하는 극기의 험난한 길이다. 즉 성을 따른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누리는 생의 즐거움들을 모두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가장 쉬운 말이지만 그렇게 살기는 매우 어렵다. 불경에는 근기(根機)라는 합성용어가 있다. 이는 기근(機根)이라고도 하는 것으로써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 불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의 차등에 의해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로 중생을 분류한 것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이라 하였으나 자신의 역량과 노력에 의하여 상근기의 삶-도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드문 것이 삶의 실체이다.

이처럼 솔성(率性)이란 일반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많은 것(人慾)을 포기해야만 하고, 양심에 비추어 티끌만큼의 걸림도 없는 삶을 이루어 나가야 하므로 행하기가 쉽지 않고,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는 게 어려운 것이다.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를 닦는 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

 

인간의 일반적인 삶은 인간의 본질의 두 요소 중 하나인 이성(異性)의 지배하에 이루어지며 이는 동물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삶의 원초적 욕구이다. 이성(異性)은 성()에 비해 공격적이고, 강렬하며 자극적이고 화려함을 그 본질로 삼고 있다.

 

성경의 창세기편을 보면 아담하와는 삶의 모든 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누리던 중 이성(異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에 빠져 성(,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는 행위로 인하여 지상의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삶을 누리는 중에서도 이성(異性)의 지배 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순간의 분(忿)을 참지 못하여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거나, 남을 해치는 행위로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사건들이 횡횡하는 현실이 작금의 사회의 실상이다. ()을 방종하면 성이 사라지게 되고 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성(異性)이 바로 인간을 지배하는 패망의 삶이 자리 잡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수도(修道)의 삶이 항상 이루어져야 하며, 고해(苦海)를 건너는 고행(苦行,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행하는 수행)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수도를 행하는 사람은 자의나 타의에 관계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고행을 통하여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세인들은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되며,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수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삶에 관한 지혜와 혜안(慧眼)을 얻게 되고, 현시(顯示)로나 그의 언행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석가모니가 도를 찾아 나선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해를 벗어나 108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일신의 안락에 안주하지 않고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구도의 고행 길로 들어선 것이다. 즉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인식하였기에 성불을 한 후 천지사방을 거닐며 중생들을 교화 하였던 것이다. 인생의 본질은 나의 득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가르쳐 함께 성불하는 데 있다. 즉 너를 구제하는 일이 내 삶의 완성으로 이르는 길이다.

 

성경에는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 중략 -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을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라는 말씀으로 성을 지키는 파수꾼-수도를 행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책무는 악인을 구제(경고와 설득)하는 일임을 알려주며 책무를 성실히 다할 것을 명하고 있다.

수도(修道)를 일컬어 교()라고 함은, 바로 타자(중생)의 존재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예비 되어 있어야 내 삶이 완성되어질 수 있다는 인생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 사람 인()의 획수가 2 획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2 획의 구성은 큰 획과 작은 획으로 조합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선 두 명의 사람, 즉 하나의 큰 사람(大人:대인군자)과 작은 사람(小人:간사하고 도량이 좁은 사람)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것을 설명한다. 만일 타자가 없다면 교()의 대상이 없는 것이므로 수도(修道)의 행위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편 성경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의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고 하였으며,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명령함으로써, 이웃(타자)이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인생의 본질)을 수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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