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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실존으로 본 과거-현재-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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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5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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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나간 과거와 변화하는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 속에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개념으로 시간을 구분하여 살아오고 있다. 과거를 토대로 하여 현재가 있고, 현재는 미래의 꿈을 실현하는 오늘의 장(場)이 되고, 미래는 인간이 세운 꿈을 이루어 가는 예정된 날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미래가 없다면, 인간은 삶의 의욕을 잃을 것이며 꿈도, 희망도 없는, 드넓은 사막의 한가운데에 홀로 내버려진 듯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대체 과거란 현재 이전의 시간이며 미래를 앞에 놓인 시간이라 여기지만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으로 된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한 가정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일직선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단단한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관찰자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말하였다. 빛 한 점 없는 밀폐된 공간 속에 갇혀있는 사람에겐 처음 얼마 동안은 시간의 흐름이 인식된다. 그러나 모든 감각기관이 닫힌 채 오직 청각만이 살아 있는 상태 하에서는 자신의 숨소리만 인식될 뿐 모든 변화하는 현상들이 멈추어버린 것을 인식한 어느 순간부터는 객관적 시간은 정지해 버린다. 객관적 시간의 흐름이 멈추게 되면 자신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주관적 시간이 작동하지만 종국에는 시간에 대한 인식은 소멸되고 탈시간화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시간이란 정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흐름에 의한 현상의 변화 속에서 인간에게 감지된다. 이를 두고 ‘니체’는 시간이란 영원한 현재라고 말하였다. 과거의, 과거의 과거는 오직 끊임없이 이어져 온 현재의 연속적인 변화들의 퇴적물이다. 실존의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의 궤도는 현재의 지속적인 흐름에 의한 현상으로서의 퇴적물을 보고, 시시각각 일어나는 현재의 현상의 변화로 시간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로써 현재와 과거는 시간상의 현존하는 현상으로써 그 개념이 성립되고 감지된다. 그러나 미래라는 것은 변화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거나, 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식으로서의 개념은 가질 수 있으나 실존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미래라고 믿는 것은 현재의 진행형일 뿐 그 실체가 별도의 시간 개념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후설’은 현상학에서 대상이 실존의 현상으로 주어지는 ‘지각의 현재’야말로 결코 물리학적, 수학적 시간 개념이 주장하는 것처럼 점이 아니라 일정한 폭과 확대를 지닌다. 현재의 이러한 확대는 ‘방금 지나가 버린 것을 여전히 현재에 이어주는 활동’으로서의 ‘파지(Retention,과거)’와 ‘지금에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다려 받는 활동’으로서의 예지(Protention,미래) 및 현재의 중핵을 이루는 ‘시간의 원천’으로서의 근원인상(Urimpression)이라는 세 가지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준현재화 계열과, 현재의 확대를 구성하는 ‘(과거)파지-근원인상-(미래)예지’라는 계열로 성립된다. 과거 - 현재 - 미래 <-준현재화 계열
파지 근원인상 예지 <-현재화계열
<후설 현상학에서의 시간의 분석> 여기서 현재화란 ‘대상을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활동’이며, 준현재화란 상상과 상기와 예측처럼 대상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마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드러내 보이는 의사적인(quasi) 정립의 활동’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가요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은 ‘미래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존의 개념에서 시간이란 실존의 현상으로 본 파지의, 파지의 파지…라는 방식에 의한 과거와, 파지-근원인상-예지로 구성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의 발자취인 현상으로 존재- 현재란 과거와 미래의 접점으로 인식될 뿐이다. \'미래’란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간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실존의 형태로서의 시간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확정되지 않은 내일이라는 미래에 꿈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한 채 오늘을 살고 있다. 인간에게서 미래란 시간을 빼앗아버린다면 그보다 더 큰 고통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이란 혹자에게는 오늘의 고충을 보상받는 날이 될 것이고, 혹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며, 혹자에게는 죽음의 불안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실존의 존재로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비실존의 단계에 머물며 신의 절대영역인 내일이라는 시간을 인간의 의지대로 통제하며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모순일 수밖에 없다. 내일이라는 시간의 존재성의 자명한 모순 속에서, 인간은 내일을 실존의 시간으로 확신하며 오늘의 이 지옥 같은 삶이 내일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헛된 망상으로 자살을 하는가 하면, 판도라의 상자를 꼭 껴안고 설렘 속에서 내일의 꿈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딛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내일이라는 비실존의 시간에 의지하여 자신의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하게 되고 삶을 항상 미완성인 상태로 미뤄두게 되는 불온전한 삶을 살게 된다. 즉 한 치 앞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미래의 날을 가불해서 오늘의 꿈을 이루리라는 공상 속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일이라는 시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게 된다면, 나에게는 내일이라는 게 없다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일까? 너무 터무니없는 사실로 당신을 윽박지른다고 불평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의 사건이다. 인간은 모두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만이 시한부 삶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처럼 하늘이 인간의 삶을 관장한다는 게 더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의 끝인 죽음-실존의 존재로의 남은 시간- 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먼 후일의 일로 단정을 내리고 내일이라는 비실존의 시간에 매달려 오늘을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염원하며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항상 설계만 하고 있으니 진정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뜻대로 이룰 수가 없는 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되던 해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문학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를 당하고 벨린스키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반체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그해 12월 사형대에 서게 되었다. 사형 집행인은 형 집행 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으로 5분의 여유를 주고 3분전…, 1분전… 그리고 형 집행을 외친다.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격을 하려는 그 순간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형 집행 중지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황제의 특명으로 사형에서 강제노역형으로 감면되어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는 각오로 매 순간을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는 신의 선물로 여기며 살았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우리는 미래를 기다린다. 빨리 와 주지 않아 우리가 끌어당겨 오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는 얼빠지게도 자기 것이 아닌 시간 속을 헤매며, 자기 것인 유일한 시간(현재)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공허하여 현재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꿈꾸며, 현존하는 유일한 시간에서 맹목적으로 도망쳐 버린다. 이것은 현재가 대체로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에게 미래라는 지주(支柱)를 주려고 애쓰며, 우리가 도달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시간을 위해 힘겨운 일을 준비하려고 한다.’라고 말하며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실존의 세계에서 비실존의 형태로 정의되는 내일이란 미래는 사막의 신기루이지 인생에겐 과거와 파지-근원인상-예지로 구성되는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인생에서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는 사형수의 깨우침으로 오늘을 미완성의 상태가 아닌 완성의 상태로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삶이다. 오늘을 감사함으로 산 자만이 내일의 시간을 절대자에게 간구할 수 있다. 내일이란 내가 더욱더 완성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절대자가 나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인간은 신이 허락한 시간을 누릴 뿐, 시간을 꾸어 온다거나 늘이거나 줄이는 등의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이 족하며,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당당히 맞이할 수 있는 오늘을 산 자에게 내일이란 감사와 축복의 날로 추가로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지닌다. 미래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오직 신의 것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괴테가 남긴 말을 음미해 보자. “현재에 열중하라. 오직 현재 속에서만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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