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NARSHA VIEW

인문학강좌

15. 실존의 현상에 의한 본질의 왜곡
21.05.28
admin


 

 

 

 

전체는

결코

부분의

합으로

대변될 수

없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하며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개인은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서 인간의 존재방식을 선택하며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라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주변과 상황을 핑계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살기에 긍정적이며, 도전적이고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 본질이 없는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베르 까뮈는 그의 작품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그가 행한 행위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타자에 의해 실존의 현상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본질로 인해 사형을 당하게 된다. 뫼르소는 인생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무덤덤하게 별 생각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의 죽음 그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고, 장례를 마친 다음 날 애인과 해수욕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와 사랑을 나눈다. 실존으로서의 뫼르소에게 어머니의 죽음이란 사건은 무가치하며, 그에게는 애인과 함께 바닷가에서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고 집에 돌아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단순한 일상으로서 가치 있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에 선행 한다는 타자들은 세상의 도덕을 운운하며 뫼르소를 패륜아로 규정짓고, 강렬한 태양의 반사에 의해 일순 자신도 모르게 발사된 총알은 그를 계획적이고 냉혈한 살인범으로 몰고 가 사형을 시키게 되는 부조리를 만든 것이다. 이는 실존의 현상에서 본질은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실존의 부조리를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이다.

 

실존의 현상에서 유추된 가상의 본질은, 다수의 타자에 의해 사건의 본질로 왜곡되고, 이러한 부조리를 사회는 조리로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의 당사자는 자신의 본질을 왜곡한 부조리에 의해 단죄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본질보다는 각기 다른 개체로서의 실존, 특히 타자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개인의 실존을 강조하는 개별적인 에게서 출발한 현상이 본질을 왜곡한 대표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실존을 본질보다 앞세우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표상으로 드러난 실존의 현상을 통해 본질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일까?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의 본질은 무한대의 실존의 현상-갖가지 사랑의 행위-으로 구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사랑의 본질은 주관이 되고 실존의 현상으로 구현된 사랑하는 행위는 객관이 된다. 자식을 아끼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의지는 다양한 형태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 표상으로 나타난 것은 부모의 위치에서는 객관적인 것이 되나, 이 표상만을 지켜본 타자에겐 주관으로서 인식되어진다.

미운 아이에게 떡을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떡을 주는 행위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본질의 표상이다. 이러한 객관적 행위는 떡을 주는 사람의 의지 즉 본질을 증명할 수 없다.

미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3가지로 들 수 있다. 착한 아이, 나쁜 아이 그리고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아이이다. 드러난 행위 즉 실존의 현상으로 3가지의 본질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같이 아예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이란 무한대의 객관으로도 규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 말에 마누라와 자식사랑은 속사랑이란 게 있다. 마누라와 자식에 대한 사랑은 가슴에 품고만 있어야지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위의 속사랑과 같은 사상을 철저히 지키셨던 분이었다. 과묵하고 다혈질이셨던 아버지는 집에선 절대군주이셨다.

 

필자가 11살이었을 때 학교에서 치른 시험에서 한 과목의 성적이 전번의 성적보다 많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에 격노한 아버지는 나를 창고의 대들보에 높이 매단 적이 있었다. 허공에 뜬 채로 30분의 시간이 지나서야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종아리 회초리 맞는 것은 다반사였고 칭찬을 듣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꾸지람을 듣는 게 일상사였다.

 

이러한 아버지이셨지만 필자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던 것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비밀스런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시던 아버지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날이면 매번 잠자는 듯 숨을 죽이고 있는 나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잠이 들기 직전의 몽롱한 상태에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길은 65세가 된 지금껏 느껴 본 좋은 감정 중에서, 가장 감미로운 감정으로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의 본질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주시는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이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아버지를 따르는 사랑으로 맺어진 순수한 부자관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주관)이 현상(객관)으로 드러날 때에는 나는 포악한 아버지에 의해 학대당하고, 멸시 당하며 천대받는 불쌍한 자식으로 타자에 의해 정의되어진다. 만일 낚시를 즐기시던 아버지 - 아버지는 낚시를 가실 때면 항상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니셨다 -께서 나와 함께 낚시를 가서 나의 부주의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내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면 목격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이 사고는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까?

 

사건 이전에 타자에게 비쳐진 실존의 현상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행위로 보기에는 모든 게 부정적이며 아버지에게는 모두 불리한 정황들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흠뻑 젖은 옷과, 다급하게 외치던 도와달라던 함성, 그리고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비통한 울음소리들은 타자에 의해 진실이 아닌 가식으로, 위장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여기에 한, 두 사람의 근거 없는 의혹의 증폭에 의해 아들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돌게 되면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식을 눈을 뜨고 보는 앞에서 저 세상으로 보낸 아버지의 심정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식을 구하지 못한 심한 자책감으로 죽음보다 더 힘든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실존의 현상으로 타자에게 오인된 학대하는 아버지와 학대당하는 아들로 단정 지어진 왜곡된 본질은 순수한 부자관계의 사랑을 본질로 한 아버지의 가슴에 또 한 번의 비수를 꽂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순수한 사랑의 관계를 본질로 한 실존의 현상은 본질과는 완전한 대척점인 학대를 본질로 한 귀결로 이어지게 된다. 자식을 아끼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의지는 다양한 형태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 표상으로 나타난 것은 부모의 위치에서는 객관적인 것이나, 이 표상만을 지켜본 타자에겐 주관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본질과 실존의 현상은 왜 이토록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걸까?

이것은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가 아니라 본질은 실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만일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주장대로라면 본질은 실존에 의해 형성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인 자유의지양심은 실존 후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일까? 나 스스로가 자유의지와 양심을 만들어 낸 것인가, 아니면 타자에 의해 학습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인가?

인간의 본질인 자유의지와 양심은 온전체의 일부로서 산모의 자궁 속에서 지내던 태아의 상태 즉 비실존의 상태에서 이미 형성된 것이다. 실존은 로 구성된 독립체로서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에 태아는 실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태아는 출산을 통해 비로소 실존의 독립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로 본질은 실존에 선행한다.’는 논거가 성립된다.

 

실존의 현상에 의한 본질의 오류는 객관으로서의 실존의 현상을 귀납적으로 주관으로서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개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실존의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연역적으로 주관으로서의 본질을 기저로 객관으로서의 실존의 현상을 규명하여야 한다. 본질은 실존의 현상에서 출발하여 귀납적 추론으로는 결코 규명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참된 본질은 변화하는 물질적 대상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들 밖에 있으며, 상대적인 존재자들을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서 정위하는 현상이다. 본질이란 가시계(可視界)가 아닌 가지계(可知界)이며 영원한 형상으로 구성된 실제적인 세계이다.

 

본질(온전함)이란 불변하는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 머물며 변화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서 편견과 습관화된 인식일 뿐이다. 본질은 실존에 선행한다.

 

실존에 어떠한 자극이 내외부에서 주어졌을 때 본질의 평온함은 깨트려지고, 평온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식(결핍)이 생성되며, 인식은 의지를 만들고, 의지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욕구가 생성된 후, 다양한 욕구 중 하나 혹은 다수의 욕구가 선택되어 행위로 표출된다. 이러한 욕구의 성취를 위해 표출된 행위는 실존의 현상으로 타자에게 인지된다.

 

본질은 이와 같이 연역적 절차에 의해 실존의 현상으로 표출된다. 행위의 표출로 타자에 인지된 실존의 현상은 가시적 표상에 의한 행위에 의해 유추될 뿐, 자극에서부터 출발한 실존의 현상으로써의 절차를 귀납적 추론으로 본질을 규명한다는 것은 출발부터 어긋난 것으로써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타자의 눈에 비춰지고, 인식되며 단정된 실존의 현상에 의한 본질의 왜곡은 제2의 제3의 뫼르소를 부조리에 의해 처형하게 된다. ‘본질은 실존에 선행한다.’는 명제 하에 재정립하여 본질의 외곡을 막아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심리학과 상상력(1938)’, ‘자아의 초월(1937)’, ‘상상력의 심리학(1940)’ 등의 저술에서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사유경험과 객관적인 사물경험 사이의 이원론을 토대로 하였다.

 

그는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없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그의 과거로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선택하는 실존이다.’, ‘언제나 인간은 만들어져 가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라며 인간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인간을 보증하는 것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보았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과 만나 실존적 정신분석으로 발전하여 인간은 단지 그것들이 인간의 조건으로서만 있을 뿐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인 인간이라는 실천적 인간실존적 인간으로 정의하였다.

실존적 정신분석에서는 성이나 리비도와 같은 무의식의 구성요소를 세계구성을 향한 인간의 실존적 운동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두고 어니스트 겔너는 실존주의는 인간 상황 일반에 관한 설명임을 자처하고 있으나 기실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별난 종류의 인간 상황이며, 또 인간의 상황을 알고자 구태여 난해하고도 장황한 철학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비판했다.

실존주의에 기반을 둔 심리학은 객관적인 통계에 의해 유추된 가상의 본질에 초점을 두고 현상학적 행위를 치료하고자 한다. 이러한 치료는 현상학적 행위를 일으킨 본질에의 근원적인 치료가 아니라 마치 몸에 가시가 박혔을 때 눈에 보이는 가시만 뽑아버리고 치료를 완료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현상학적으로 드러난 가시는 제거하였지만 가시의 본질인 독성을 무시한 결과 후일 독성으로 인해 생긴 종기를 제거하기 위해 염증 부분만이 아니라 순수한 살까지도 도려내야 하는 고통과 수고를 면할 수 없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핵심사항인 무의식은 리비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리비도(libido)란 사람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성욕, 또는 성적 충동을 이야기 한다. 융은 이를 생명의 에너지로 해석하였다.

여기서 리비도는 본질이 아니라 욕망과 의지의 덩어리일 뿐이다. 리비도는 인간이 생명을 가진 독립체로서 실존의 자격을 취득할 때 부과된 결핍분리 불안을 본질로 한 정신계의 일부분이다. 결핍과 분리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그 무엇(리비도)은 성욕, 식욕, 공격성, 불안 등의 형태로 표출되어 객관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인간이 비이성적인 상태로 내몰렸을 때 흔히 인간의 본능이라는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에겐 푸짐한 먹을거리와, 그들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여인을 전리품으로 허락하였다. 이들은 며칠을 굶주린 이리떼요, 발정 난 개떼와 다를 바 없다.

 

실존으로서의 심리학은 이러한 환자들에게 기름진 먹을거리와, 성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처방함으로서 그들을 달래어 몸에 박힌 가시만을 뽑아버리는 행위로 치유의 책임을 다하였다고 믿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처방은 일시적 성과일 뿐 항구적인 치료가 되지 못한다.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작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행위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근원적인 치료는 불가능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논리 하에서는 리비도를 움직이는 그 무엇은 인간의 생득적 본질인 결핍과 분리불안의 해소로 귀결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푸짐한 먹을거리와 성욕을 채울 여성이 아니라 단란한 가족의 밥상과, 베기만 하면 스르르 잠이 드는 어머니의 따스한 무릎이 진정한 치유의 근원인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톱이 있어 나무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자르기 위해 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목적(본질)을 이루기 위해 도구(실존)가 필요한 것이지, 도구(실존)가 있어 목적(본질) 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에 기인한 철학과 심리학 등은 지양되어야 하고 본질은 실존에 선행하며, 본질은 객관의 합으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온전함을 지닌다.

목록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