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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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4
admin

16. 죽음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다.

오늘의 내가

실존한다는 것은

지금 바로 전까지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고정된 점이 아니라

흘러가는 점이다.

인간의 삶 중에서 최대의 화두는 죽음이라는 숙명적 사건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일상생활 중에서는 잊혀 진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타자에게만 일어나는 막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도 시리아 난민 수백 명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침몰한 사고가 발생하여 현장에서 최소 45명이 익사했고 135명이 구조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죽음이란 실존의 존재로 오늘을 살아가는 자아에게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을 뿐, 실존의 자아가 경험을 통해 체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다가오거나, 먼 미래에 닥쳐오는 사건으로 믿고 있기에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 전쟁에 참전 중인 군인이나, 운행이 정지된 채 고공에 떠 있는 케이블카에 갇혀있는 경우 또는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경우 등의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도 하다.

 

현상의 변화를 기저로 한 실존의 입장에서는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의 진행형만이 존재하며, 미래란 한 낱 관념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허구일 뿐이다.

지중해에서 침몰한 시리아 난민선은 죽음의 그물에 갇혔지만 난민선에 탄 사람들 중 135명은 구조되어 죽음의 그물에서 탈출하였던 것이다. 1척의 배에 동승한 사람들은 공동운명체이었지만 배의 침몰이란 사고로 인해 최소 45명은 죽음에 처하였고 135명은 생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던 중 추락사고로 인해 모두가 죽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도 공동의 운명체에 내린 죽음이 비켜간 예도 있다. 이들 생존자들에겐 죽음의 상황이 닥쳤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는 사실로써 실존의 상태에서 맞이한 죽음이 과거의 한 순간으로 지나쳤음을 깨닫게 된다.

 

이외에도 미스터리하게도 생물학적으로 사망진단을 받고 난 후 며칠이 지나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도 있고, 자동차 운행 중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진 사고에서도 모두가 죽은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도 가끔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실존의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죽음은 과거의 한 순간 스쳐간 사건으로 기록될 뿐이다.

파지(과거) 와 근원인상(현재) 그리고 예지(현재진행형) 만이 실존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개념 하에서는 내일(미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죽음을 미래의 어느 한 순간의 점으로 존재한다고 가정 하려면 내일이란 시간 개념이 스케줄 화된 현재로 존재하여야 하며 현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입증되지 않은 현상은 실존이 아니며, 시간이란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존의 자아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죽지 않았고 살아있다.\'는 죽음을 과거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원인 모를 병으로 1, 교통사고로 2번 열차사고로 1번 도합 4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겨다. 필자를 알고 있는 어른들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너는 죽었다가 살아난 00 아니냐?\' 라며 필자를 기억하고 있다.

굳이 필자의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의 요소도 있겠지만 실상은 모르고 있는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위험한 요인들에 둘러싸인 채 나날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왔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오직 실존의 나를 당연한 듯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논하자면 실존으로서의 일개인이 비실존의 존재인 채 산모의 태내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의 단계를 거쳐 합체를 이루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은 존재해 왔다. 산모의 태내에서 자연 유산이 되거나, 사고로 인해 태아가 죽거나, 사산 등의 형태로 죽음은 삶과 병행하며, 하나의 시간선 상에서 공존하며 온 것이다.

 

태내의 과정을 거쳐 출산에 이르러서도 태아는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되며 출산을 통해 실존의 존재로 인정을 받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죽음은 늘 삶과 함께 병존해 온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진행형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선상에서 생과 사는 하나로 묶인 채 병존하며 진행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은 시간이라는 하나의 궤도에서 현재진행형으로서 존재하며, 지나온 흔적을 과거로 남기고 시간의 정지선을 통하여 삶에서 죽음의 궤도로, 죽음에서 삶의 궤도로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실존의 나는 과거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현존재이며, 죽음이란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사의 궤도로 넘어가지 않고 생의 궤도에 머물기에 실존에서의 죽음이란 미래가 아닌 과거인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상면하는 형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을 잊고 살다가 갑자기 마주치는 피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비하며 살다가 죽음을 순응으로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것이다.

 

전자는 실존의 존재로서 결핍을 벗어나기 위한 욕구를 쫓다가 욕망의 노예가 되어 마주치는 생의 끝자락이요, 후자는 죽음의 본질을 깨우친 후 생을 마감하고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에 첫 발을 내딛는 생의 변곡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둘 중 하나,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처럼 영혼이 변화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오. 만약 죽음이 완전한 의식의 소멸이고,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든 밤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의심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그렇게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날 밤과, 자신이 현실 속에서 오는 꿈속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 공포와 불안과 불만에 찬 밤을 비교하면, 누구든지 꿈도 꾸지 않고 잔 밤만큼 행복한 날, 행복한 밤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러므로 만약 죽음이 그런 잠과 같은 것이라면, 적어도 그것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거외. 또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고, 저 세상에는 우리보다 먼저 죽은 현자들과 성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 세상에서 그분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런 곳으로 갈수만 있다면, 나는 한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죽을 수 있소."

죽음은 미래에 닥쳐오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거룩함이나 종교적인 영원성 등과는 관련이 없는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세계적인 정신과 전문의 \'퀴블러 로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심리변화를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피할 길을 허용 않는 죽음이지만 사는 동안 죽음에 대한 인식을 매일, 매일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드리기는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의식적, 무의식적 힘에 의해 마음으로는 철저히 배재 하는 모순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죽음에 당면하게 되면

첫째 \' 내가 왜 죽어야 해’, \'아마 오진 일게야\' 라며 자신의 상황을 부정(Denial)하는 단계요.

둘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지하게 되면 의사, 간호사, 가족 등 에게 분노(Anger)하는 단계요

셋째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때는 무신론자도 신을 찾게 됨-에게 \'이렇게 할 테, 좀 더 살려 달라\'고 협상(Bargain)을 하며 애걸복걸하는 단계요

넷째 모든 것을 통해서도 좀 더 살고 싶은 자신의 의지가 무력함을 깨닫고 식음도 전폐한 채 우울(Depression)에 빠지는 단계요

다섯째 죽음과의 항쟁에서 백기를 들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평온을 누리는 용납(Acceptance) 단계에 이르게 된다.

내가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에서 존재하기에- 지난 시간들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생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관계를 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현재

                                                                     

                                                                 파지                   근원인상                   예지


                                                                                      <실존에서의 삶과 죽음의 관계>





죽음이 과거와 현재에 동시에 병행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미래란 가상의 존재의 의미를 오늘에 부여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을 다가올 예비 된 시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내일은 단지 미련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늘 완성되어지지 않은 삶은 미완성의 삶으로 남기에, 농사를 짓고서 곡식을 떨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사람처럼 미련과 회한이 남는 삶이 될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오늘을 잡아라, 내일이 있다고 믿지 말라.\' 는 명언으로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며칠 후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은 집을 떠나기 전에 어떠한 일을 해야 하며, 어떻게 이별에 대비해야 하는 걸까? 우선은 자신이 지금까지 머물렀던 곳에서 이루어왔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할 것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 사람들에겐 감사의 인사와 함께 무언가의 보답을 하려 할 것이고, 그 동안 소원했던 이웃들에겐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함을 나눌 것이다. 그리곤 자신이 힘 있는 자로서 약자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있으면 일일이 그들을 찾아다니며 사과와 용서를 빌며 부당하게 취한 물질이 있다면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마음의 짐이 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면, 이제는 남겨진 자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분주하게 뛰어다닐 것이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자신의 삶을 남기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을 것이. 그 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길 떠날 준비를 마치게 되리라.

 

그런데 떠나는 곳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라면 이 세상의 것들이 무엇 하나 가치 있는 게 있으며, 무엇을 더 탐할게 남았으며,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원망할 사람이 남아 있을 것인가?

 

오직 지금껏 자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합리화하며 정당화하기 위해 숨겨왔던 양심의 가책을 모두 털어 내버리고, 억압했던 자들에게 한 번도 베풀어 본 적이 없는 사랑의 행위를 마음껏 행할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지 않음을 후회하며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한의 눈물과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밤에 잠자리에 들며 만일 내일 아침의 태양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면 하는 생각을 할 때, 아무런 동요 없이 오늘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잠을 조용히 청할 수 있는 오늘이야말로 사망에서 벗어난 진정한 축복으로 이루어진 삶이리라.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트(Sophokles)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 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 ! 명성을 떨쳤던 사람도 죽고 나면 이렇게 빨리 잊히는 것일까?" 라며 삶은 죽음에 의해 더 선명해지며 인간은 항상 죽음과 함께 오늘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내가 죽음에 들어섰을 때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펜을 들고 무엇인가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실존의 내가 존재함은 죽음은 과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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