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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21.10.01
hyunwoo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야말로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와 양심 그리고 실존의 존재로 현상계의 일원이 됨으로써 얻어진 분리불안과 결핍을 본질로 가진 존재이다.

생의 목적은 본질에 충실을 기하여서만 이를 수 있는 온전함으로의 회귀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부가 호미와 쟁기로 농사를 짓듯이 자유의지와 양심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쟁기는 돌을 골라내고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 옥토를 만들듯, 양심은 생의 목적에 불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그른 것을 제거하여 인간이 선을 이룰 수 있는 맑은 심성을 일구어 내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도 실존하는 절대적 존재이자, 타자를 필요로 하는 상대적 존재인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원론(一元論)적 원리의 규제 속에서만 삶이 형성된다. 살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문제는 나로 인해 생긴 것들이, 그 해답 또한 나의 내면에 있으며 타자의 존재란 나의 삶을 완성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구로서의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독자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의 근원지이며, 타자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원인과 결과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즉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로 귀결되는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라는 절대적인 원리만이 존재하는 것이 일원론이다.

 

나의 선한 행위에 나의 뺨을 때리는 타자의 행위나,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나를 기만하고 원망하는 행위도 이 모든 것은 나로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타자에게서 이 사건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잘한 것도 나의 몫이요, 못한 것도 나의 몫이며 타자가 나의 행위를 곡해한 것도 내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일원론의 상태에서 자기완성은 절대적인 자기애와 완전한 이기심을 요구한다.

절대적인 자기 사랑과 완전한 이기심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고, 타자의 존재도 그 의미를 소멸하는 상태로 변화한다.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가치는 스스로가 창조하고, 스스로가 평가를 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며 사람들에게 명령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거룩하여질 요건이 갖추어져 있으니 스스로 노력하여 거룩해지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거룩하다라는 단어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로 신의 어원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며, 사람도 거룩하여질 수 있도록 온전함의 근원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인생이란 여정은 거룩함의 성취를 통해 신의 온전함에 융합될 수 있는 존재로의 성장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또한 해동종주라고 불리는 신라의 승려 원효대사는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서(大乘起信論書)에서 일심(一心)사상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고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 또한 인간은 일심사상을 통해 부처-온전함- 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인생을 온전함을 성취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거룩함의 성취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설명하고 있다.

거룩하기 위해선 사욕을 버려야 하며,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도록 행실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여야 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이성을 지닌 존재는 인간뿐이며, 이성으로 인해 인간은 신앙을 가짐으로써 금수의 삶과 다른 삶을 누릴 수 있다. 모리스들류겔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자이며 최대의 계몽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과 정치상의 이기적 활동은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종교의 본질인 신성함과 영원함은 살아있는 한, 느끼는 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한결같이 채워준다.

우리가 탐구의 길로 나아가면 갈수록, 모든 위대한 종교의 근본 원리는 하나라는 것, 천지창조 이후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져온 가르침이 그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

모든 신앙의 밑바탕에는 오직 하나의 영원한 진리의 흐름이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의 깃발을, 유대교는 유대교의 깃발을,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를, 이슬람교도는 그들의 반월기(半月旗)를 걸게 하자, 그러나 그들도 모두, 그러한 것은 단순한 외면적인 표징(標徵)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종교의 본질적 원리는 예수, 바울, 마누, 조로아스터, 부처, 모세 소크라테스, 실러, 마호메트가 한결같이 설파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오직 자신만의 존재성에 가치를 두기에 절대적인 자기애와 철저한 이기성이 없이는 실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중 전쟁에 내몰린 일부 군인들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전쟁의 참상에서 정글에 피신하던 중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료의 인육을 먹으며 생활하다 구출된 사례가 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도덕보다는 인간의 본질인 결핍의 욕구가 더욱 강했기에 이러한 동물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야수적인 행위를 할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은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이성적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으로써 그 의문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잔인성에 비해, 유아기의 아이들은 생명이 없는 물질로 구성된 무기적인 인형을 생명 또는 영혼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인형이 어디에 부딪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되면 눈물을 머금고 진심을 다해 인형을 치료하는 행동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물활론(物活論)이라는 것으로서 성인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양심에 깃들어있는 범신론의 한 가지 이다. 일원론 하에서의 절대적 존재인 자아는 그의 행위를 함에 있어서 타자의 요청이나, 거래에 의해 제약이나 제도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단지 자아의 본질인 자유의지와 양심에 따라 타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율성에 의해 행위가 이루어질 뿐이다.

 

이원론(二元論)에서 이루어지는 단어들은 일원론에서는 그 가치가 사라진다. 즉 자아와 타자가 공존하는 시스템에서는 사랑, 헌신, 희생, 봉사, 명령, 구속, 속박 등의 단어가 그 의미를 갖게 되지만,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만이 중요한 일원론에서는 타자와의 거래가 없으므로 위의 단어들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극히 아름답거나, 추악한 단어들로써 자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타자에 의해 자신에게 붙여지는 수식어들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타자에 의한 구속이나 외력에 의해 자신의 자유를 속박 받거나 강요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원론의 지배하에 전혀 그러하지를 못한 게 사실이다.

 

인간의 본질인 분리불안과 결핍은 독자적인 존재로서 있을 때보다 상대적인 존재로서 있을 때에 훨씬 더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누구에게 특별히 강요받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일부러 자신들의 군주를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왕을 세우게 되면 자신들의 자식들이 전쟁에 동원되고, 그들 소유의 1/10을 거두어 나라에 바쳐야 하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여야 함을 알면서도 그들의 군주를 세워줄 것을 하나님께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분리불안과 결핍은 그 자체만 해소시킬 길이 있다면 그 길이 자신의 삶을 담보로 한 노예의 삶일지라도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몽테뉴의 친구이자, 보르도 재판소의 재판관이며 작가였던 에티앙드라보에티스스로 노예이기를 원하다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중은 한번 예속 당하기 시작하면 당장 자유를 망각해 버리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 좀처럼 없다는 것에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롭다는 것,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익숙해지기만 하면 무엇이나 자연스럽다

일원론에서의 자유의지는 경계 없는 초원을 마음껏 휘저으며 자신의 기량을 모두 발휘하여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발휘하는 야생마처럼 그를 그답게 만드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타자의 명령만으로 움직여지는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만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느냐, 노예로서의 굴종의 삶을 사느냐는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양심이란 텅 빈 그릇이 그릇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음식물을 담아야 하듯이 인간의 육신이 인간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의 내용물이다. 양심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삶의 모든 것을 일일이 간섭하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잠시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며, 선이 아닌 것은 제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하여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한다.

 

양심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원래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양심이 요구한 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을 때는,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인간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 책임을 추궁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일체의 타협을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요구하며 한 치도 물러설 줄 모르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쫓아다니며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이지만 양심의 소리에 이기적이고 절대적인 이기심으로 따르고 행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며, 실존으로서의 가치를 100% 모두 누릴 수 있게 된다.

 

양심은 지고지순한 선이며 절대자의 명령이다.

양심에는 이원론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당위성이란 일원론적 단어 하나로 압축되어 소멸해 버린다.

 

수많은 화려한 수식어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인류 역사상 모든 작가들이 예찬한 사랑이라는 것은 일원론적 의미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여야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단순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원론에서의 사랑은 동등한 자격으로서의 나와 네가 성립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성립된다. 이 원리가 깨어졌을 때에 비극과 불행이 일어나고 인생의 애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원론에서의 사랑은 자아만이 주체로서 존재하고, 타자는 자아의 삶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는 대상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랑은 절대적 존재에서 발현된 기투된 행위로서 타자의 반응과 결과에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이 날아간 화살처럼 시위를 떠난 순간 자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이 된다.

기투된 행위의 근원은 양심이며, 도화선은 철저한 자기애의 실현이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기록한 글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글 중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가 있다.

 

이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고 이교도 하층민으로 천시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시며 명령을 하셨다. 그러면 이교도요, 하층민으로서 유대인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와 같이 행동하였을까?

 

성직자의 직분을 지닌 제사장과 레위인이 거의 죽은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 상황에서 사마리아인은 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치료하였던 것일까? 사마리아인의 눈에는 그가 불쌍히 보였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눈에는 그가 불쌍히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치료행위를 한 사마리아인과 보고 피하여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자기애의 행위에 있어서 철저히 이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즉 일원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거의 죽은 상태로 내버려진 사람을 보고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명한 소리를 외면한 것이요, 사마리아인은 그를 본즉 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가슴에 저려와 그를 버려두고 지나치기에는 자신의 양심이 그를 괴롭혔기에 다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치료의 행위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극히 당연한 행위를 하지 않고 지나친다는 것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것이요, 자신이 느낀 고통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은 훗날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 엄청난 후회와 함께 고통을 주는 행위임을 간과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고통과 함께 생긴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행위 - 다친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 지나친 행위 - 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큰 고통으로 자라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기투된 행위는 타자가 보기에는 이타적인 행위이나 정작 행위자에겐 그냥 지나쳐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마음의 짐을 벗어 던져버림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한 진정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즉 이타적 행위를 일으킨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치료하는 행위 - 내버려진 자를 치료하는 행위 - 는 지극한 자기애의 발로로써 철저한 이기성에 기인한다. 이처럼 철저한 이기성이 표상으로 노출되었을 때 이것은 이원론에서는 이타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석가는 어느 날 유마힐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제자들을 시켜 유마힐의 병문안을 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석가의 제자들이 유마힐의 집에 도착해서 보니 유마힐이 멀쩡해 보이는 것이다. 이에 석가의 제자들이 유마힐에게 어떻게 편찮으십니까?’ 하고 물은 즉 유마힐은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대답을 하였다.

 

이는 자아와 타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불가에서는 이를 동체자비(同體慈悲)라고 한다. 가장 근원정인 자비는 바로 동체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즉 자비란 타자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자타(自他)가 일체인 탓이다.

 

일원론에서의 타자는 나에게 자극을 주는 대상으로서 나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동기이다. 치료의 대상은 당연히 자아가 되며 양심의 소리에 따른다는 것은 가장 이기적인 자기애를 구현하는 것이다.

 

일원론에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행위 - 버려진 자를 치유하는 행위 - 는 타자의 자극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긴 상처를 자신의 손으로 치료하는 것으로써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사랑은 기대와 요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치료하는 자연스러운 - 당위성에 의한 - 행위이기에 대상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이원론에서 자극을 준 당사자나 타자에 의해 지극히 큰 사랑을 한 자이다라거나 자비로운 자이다. 헌신하다, 희생하다, 봉사하다라는 말들로 지칭되어진다.

 

일원론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아 즉 자신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애는 바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타자에 의해 간섭을 받거나 구속을 당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에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일원론의 세계에서는 오직 절대적 존재인 자아만이 성립되며 자아의 완성은 오직 자아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진다.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와 양심에 의해, 동체자비의 상태에서 인생은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 속의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인간의 최고의 특질은 그가 정신적 안정 상태에 있을 때 그 의식이 이성의 원천과 교류하여, 무한한 영적 생명과 융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원천에서 직접 영혼의 양식을 길어 올리려 하지 않고, 마치 거지처럼 고인 물 한 국자를 서로 동냥하고 있다.”

-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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