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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랑, 자비, 헌신, 희생
20.12.10
admin

 


 

 

 

 

 

나로부터 나아 온

참된 것이

사랑이요

자비요

헌신이요

희생일 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사랑, 자비, 헌신, 희생이라는 네 단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말들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 네 단어들을 배워 왔고 이것을 이웃에게 베풀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 네 단어들은 나와는 소원(疎遠)해지고, 타인에게 그 단어가 주졌을 때는 박수를 보내고, 찬사를 쏟아내게 된다. 의인이니, 모범 시민이니 하면서 추모행사를 벌이고 기념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작 나 자신과의 관련성을 생각하면 선뜻 다가서기엔 무언가 걸림이 있고,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왜일까?

 

사랑이란 단어는 나에게 막연히 좋은 것을 가져다 줄 것 같아 상당히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반해 자비, 헌신, 희생이란 단어는 나의 것을 빼앗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받아들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

사랑이란 단어는 내가 탐할 수 있는 것으로써 나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자비, 희생, 헌신이란 단어는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닌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써 나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의 네 단어는 모두가 이타심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단어들은 행위자의 자유의지의 발로로 이루어진 실존의 현상이 타자에게 비쳐짐으로써 타자에 의해 지칭된 것들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개념이, 행위의 당사자에게는 무덤덤하고 그리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극히 겸손하게 들리는 행위자의 한결같은 대답은 저는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을 한 것뿐이고,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상황에 맞닥트렸다면 그도 역시 저처럼 그러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의 행위는 당위성에 의해 저질러진 실존의 현상일 뿐이다.

 

2001126일 오후 715분 일본 도쿄 신오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가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때마침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같이 구조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노시로씨와 함께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되짚어 보면 이수현씨와 세키노시로씨는 그 누구의 지시나, 타자에 의해 등이 떠밀려 선로에 떨어진 게 아니라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자극에 의해 투기(投棄)된 것이다. 그들에겐 사랑, 자비, 희생, 헌신이란 단어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예 없었으며, 그 어떤 생각도 그들의 행위를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 후 역의 단 하나뿐인 개찰구에는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동판이 벽면에 설치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LSH아시아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정부의 훈장, 각종 감사패, 감사장, 상장 등 다수의 상훈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해마다 고인의 기일엔 이수현 씨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면 자기보호본능에 의하여 필사적인 방어행위나 공격행위를 한다. 피할 곳이 없는 구석에 몰린 쥐는 지금껏 도망만 치던 상태와는 달리 오히려 고양이에게 대드는 공격행위를 한다. 인간도 역시 본능적으로 예외일 수는 없다. 급박한 상태에 빠지면 움츠려 숨거나, 도망을 쳐 그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본능의 욕구를 벗어난 이수현 씨와 세키노시로 씨의,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 선로로 뛰어내린 행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는 것일까? 절체절명의 급박한 상황에 그들의 몸을 투기한 행위는 오직 취객을 구해야만 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순식간에 몸을 던진 일방적인 행위일 뿐이다.

 

심리학의 용어 중 방관자 효과(책임 분산 효과)’라는 게 있다.

이 용어는 눈앞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어도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들이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며 그 상황을 방관하고 개입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 중국 산시 성에서 나이든 여성이 길을 가다가 도로변에 주차된 승용차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머리가 자동차 바퀴 밑에 어간 채 방치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장의 폐쇄회로(CCTV)의 영상에는 쓰러진 사람의 바로 옆으로 오토바이와 차량들이 그냥 지나치고 총 25명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도 못 본 채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장면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포산 성에서는 두 살짜리 아이가 차에 치인 후 18명의 행인으로부터 방치된 사건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8명의 행인 중 한 명은 트럭이 그 아이를 한 번 더 치고 지나간 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다.

 

방관자들은 양심의 소리엔 귀를 닫고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도와주겠지라는 안일한 사고방식과,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관련된 성가신 일들에 빠지지 않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보호본능으로 인해 모두가 하나같이 현상을 외면한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늦고 씨족이나 부족으로 구성된 소수의 공동운명체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창궐한 오늘날은 고도의 물질문명이 발달한 것과 달리 정신문명의 급격한 쇠락에 의해 나타난 부패한 사회 현상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이러한 사례가 지구 곳곳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에서는 사랑, 자비, 헌신, 희생이라는 단어는 곧 의미를 잃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당사자와 상대방 간의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를 염두에 둔 철저한 계산 속에서 이루어지는 양방형 행위이다. 일방형 행위는 투기된 행위로서, 반향을 기대하지 않으며, 일단 투기된 행위는 행위 자체만으로의 가치를 지닐 뿐, 행위의 결과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력에 의한 현상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며, 그 결과 행위자의 의도 - 양심의 소리에 따름 - 는 무위(無爲)에 있으며 단지 타자에 의해 평가될 뿐이다. 그러므로 행위자에 붙여진 사랑, 자비, 희생, 헌신이라는 단어는 일방형 행위자 자신에겐 사치스러운, 부자연스러운 단어일 뿐이다. 이에 반해 중국 산시성의 사건은 양심의 소리를 정면으로 거부한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발생한 것이다.

 

인간 사회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타자와 함께 공존하는 사회이다. 인간은 타자 속에서 존재하며, 타자에 의해 그 삶이 완성된다. 타자가 있어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고, 불행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웃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완성할 대상이다. ‘이웃을 사랑한다함은 나의 양심의 소리를 그대로 행함이요, 그럼으로써 사회에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다함이요, 행복을 누리며 나의 삶을 완성해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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