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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양심의 본질
21.01.18
admin

 


 

 

 

 

 

양심에는

?

없다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상식을 넘어 선 추악한 짓을 한 사람에게너는 양심도 없다라거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진 사람들에게 너의 양심에 물어 보아라는 말을 하며 양심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자의식을 갖는 시기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떨쳐버릴 수 없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양심이다. 양심은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써 우리에게 인간다움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 자신을 죽음의 순간까지 따라다니며 죄의식을 질책하는 유일한 속박의 그물이다.

 

헤겔사전에는 양심이라고 번역되는 Gewissen함께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συνεⅰδησι? , 라틴어의 conscientia 의 독일어 번역이다따라서 양심(Gewissen)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요소와 안다라는 요소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양심이란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도덕적인 의무에 적합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헤겔법철학에서 양심을 즉자대자적(卽自對自的)으로 선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면서 낭만주의자들의 주관적이고 형식적인 자기 확신에 불과한 양심을 보편적인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특수성을 원리로 하여 그것을 행위에 의해 실현하는 자의 악일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하여 엄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철학사전에서는 양심이란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이라고 말한다. 위의 논거에 의하면 양심이란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양심이라는 2가지의 선물을 주었다.

 

미국 1대 대통령 조지 워싱(Washington, George)’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양심의 불꽃을 끄지 아니하도록 힘껏 노력하라고 말하였다. 양심이란 생득적인 것이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그 빛이 바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득적인 양심은 밝고 투명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음으로써 모든 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밝고 투명한 양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욕망에 집착함으로써 삶에 지저분한 얼룩을 남기고, 이렇게 침착된 얼룩은 투명성을 점점 소멸하게 한다. 투명성을 잃은 양심은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 왜곡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선택의 단계에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이로써 양심이란 각 개인의 인식에 따라 차이가 생기게 된다. 차이를 유발하는 요인에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외적 요인은 역사성, 지역성, 종교 법률 사회적 정의 등에 의하여 양심의 본질 위에 덧씌워진 것이 화석화된 것이며, 내적요인은 강렬한 욕구가 순수한 양심과의 타협에 의해 양심의 본질에 100%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심의 본질은 절대자의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양심은 이성(理性)의 성숙과 함께 그 실체가 명료해지는 것으로서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선택의 결정을 내릴 때 내부요인과 외부요인으로부터 자유롭고 마음속에 단 한 점의 ? 도 남지 않는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 란 결론을 내리기엔 걸림이 있는 상태로서, 온전함에, 심적 자유로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일컫는 것이다.

 

양심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원래부터 존재해 온 것이며 변증법의 정립, 반정립, 종합(卽自-對自-卽自的對自)의 연속적인 전개에 의해 귀결되는 마지막 단계인 절대영역이다.

절대영역은 정, , 합의 구분이 없는 온전체의 단계이며, 절대자, 사랑, 자비로 귀결된다.

 

P. 헨리 는 사람은 스스로의 양심에 봉사함으로써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양심대로 산다는 것은 조리와 부조리,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엄청난 고충과 현실적인 불이익이 따르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고 후회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이에 반해 양심을 따르지 않는 삶은, 현실적인 이익을 누리게 되고 쾌락과 부러움의 삶을, 잔치집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항상 세상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불안한 삶을 감수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은 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조르주 베르낭스미래의 사람들은 양심을 간질이기 위해서는 아마도 쇠망치와 못이 필요할 것이다라며 경고하였다.

양심의 칼날은 연마를 게을리 하면 금방 무뎌져 그 날카로움을 잃게 된다.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칼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듯이, 무디어진 양심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감에 바르지 못한 길로 빠져들게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피해갈 수 없는 게 있으니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 재판이다. 특이하게도 재판은 원고도 없고 검사도 변호사도 없이 단지 재판장만 홀로 있는 재판으로서, 재판이 열리는 시기는 지정 기일이 없는 실존에서 비실존의 단계로 접어드는 죽음의 문턱에서 행해진다. 재판장은 양심이며 재판 대상은 한세상을 살아오면서 양심의 소리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에 대한 그의 삶이다.

재판에서 내리는 처벌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 앞에서 두려움과 함께 시작된다. 지난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하며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지난날의 행위들에 대해 스스로를 향한 비난과 어리석음에 대해 회한 속에서 떨게 된다.

 

이처럼 양심이란 신이 자유의지와 함께 부여한 선물로써 이를 잘 따른 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인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양심을 외면한 자는 세속적인 욕망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정신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없다. 양심의 소리를 듣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사느냐, 불행한 삶을 사느냐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성경에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의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양심에 발목이 잡힌 자는 자신의 삶이 타락의 길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게 된다, 양심이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지고한 명령이며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온전체로의 합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흔히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는커녕 상대방에게 자신이 잘못한 책임을 돌리는 뻔뻔한 사람을 종종 보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발뺌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을 두고 우리는 양심도 없다.’라거나 양심이 두껍다는 표현을 한다. 만일 양심이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병원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뇌사 상태에 빠져 무의미한 시간만을 흘려보내는 식물인간이거나,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존재일 뿐이다.

 

양심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빛이며, 타자를 통하여 나의 삶을 완성시켜 주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양심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삶의 의미이며, 살아가야 할 동력이고 외부의 모든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유일한 것이다. 인간은 양심의 소리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면 실존의 삶을 마치는 순간에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피안의 세계로 떠나게 되지만,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삶은, 실존과의 이별이 가까워질수록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엄청난 공포와, 지나온 날들의 삶에 대한 회한에 휩싸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양심이란

성경에서 이르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거룩함이요,

불교의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이르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으로

모든 중생에게는 본래 부처와 똑같은 본성(불성)이 있다는

불성을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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